투명성 가정의 실패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두 번째 도구는 투명성 가정입니다.
드라마 프렌즈를 보면 매 장면마다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습니다. 그때마다 배우들의 생동감 있는 연기와 익살스러운 표정, 과장된 행동들로 인해 우리는 굳이 소리를 굳이 듣지 않더라도 어떤 상황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극적인 효과를 최대한 가져가기 위해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에 맞는 행동과 표현, 말들을 우리가 통상적으로 익히 알고 있는 사회적 관념 내에서 투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투명성 가정이란 우리가 누군가를 만날 때, 그를 제대로 이해할 시간이 없다면, 그 사람의 표정과 행동을 통해 그 사람의 내면의 생각,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가정입니다.
책에서 소개한 투명성의 가정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매사추세츠대학 다트머스캠퍼스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제니퍼 퍼게이트라는 심리학자는 'FACS(Facial Action Coding System)', 즉 안면 동작 부호화 시스템의 전문가입니다. 이 시스템은 얼굴 근육의 43개의 움직임에 각각의 고유번호를 할당해서 사람의 표정을 읽어냅니다.
여기서 퍼게이트는 안면 동작 부호화 시스템을 통해 프렌즈에 나오는 배우들의 표정을 읽어내는 실험을 진행합니다.
15화에서 로스는 자기의 여동생가 친구인 첸들러가 서로 껴앉는 장면을 처음으로 보게 됩니다. 그리곤 아파트로 곧장 달려가 문틈으로 첸들러를 다그칩니다. 여기서 로스가 자기의 여동생과 친구가 애정행각을 벌이는 장면을 볼 때, 'FACS'로 분석된 로스 얼굴에는 분노와 혐오의 표정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곧이어 로스가 모니카의 아파트로 달려갈 때는, 찌푸린 이마와 가늘게 뜬 눈을 뜨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전형적인 분노의 표현입니다. 프렌즈와 같은 시트콤처럼 모든 사람들이 행동한다면 우리는 낯선 사람을 파악할 때, 실수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윈의 아이디어
1872년 찰스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을 출간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웃음 짓기와 눈살 찌푸리기, 코 주름 짓기는 우리 감정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서로에게 전달하기 위해 진화적 적응의 일환으로 하는 행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에스파냐 사회과학자 두 명이 찰스 다윈의 주장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를 합니다.
인류학자 하리요와 심리학자 크리베이는 행복하고, 슬프고, 화나고, 겁먹고, 혐오를 느끼는 표정의 다섯 가지 사진과 중립적인 무표정의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스페인 마드리드의 아이들에게 사진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맞추는 실험을 진행하였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 사진의 감정을 설명하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았고, 대부분 맞게 해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외딴 지방에서 고립되어 생활하고 있는 트로브리안드 제도의 섬에 살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같은 사진을 가지고 각각이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사진인지 설명해 보도록 했습니다. 만약 다윈의 가정이 맞다면, 트로브리안드의 학생들도 사진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맞추는데 어려움이 없어야 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이는 사진에 대해 두 지역의 학생들이 가장 유사하게 해석했지만 그마저도 60프로 이상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의 사진에 대해서는 일치율이 반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심지어 혐오를 보이는 사진에 대해서 트로브리안드 제도의 학생들은 그 사진이 공포를 표현한 표정이라고 가장 많이 해석했습니다.
즉, 인류는 진화론적으로 같은 감정에 대해 통일하게 행동한다는 다윈의 가정을 틀린 겁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투명성의 가정을 근거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면 오히려 오해만 쌓이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투명성이라는 신화
안면 동작 부호화 시스템에 따르면 사람은 깜짝 놀랄 때, 먼저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두 번째로 눈이 커지며, 세 번째로 입도 크게 벌어지게 됩니다. 그럼 정말 모든 사람이 이렇게 비슷한 표정을 짓는지, 아니면 각자 다른 표정을 짓는지에 대해 독일의 심리학자 아힘 쉬츠볼과 라이버 라이젠차인은 60명을 실험자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합니다.
60명에게 기억력 테스트를 진행하고 문을 열었을 때의 깜짝 놀라는 표정을 카메라로 찍었고, 모든 사람들의 표정을 부호화하였습니다. 결과는 놀랍게도 단 5퍼센트의 사람만이 부호화 시스템에서 정의한 '놀란 사람의 표정'을 지었습니다. 17퍼센트에서는 놀란 표정 중 두 가지 현상만 보였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표정이거나 혹은 찌푸린 표정을 지었습니다. 자신이 충분히 놀랐기 때문에 표정도 분명히 놀란 표정을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피실험자들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사람들의 표정에서 우리는 그들의 감정을 대부분 정확히 읽어낼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투명성 가정의 실패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례들을 보여줍니다. 친구의 죽음에도 슬퍼하는 감정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웃거나 남자친구와 거리낌없이 애정 행각을 했던 아만다 녹스는 20살의 미숙한 사회 부적응자였기 때문에 단순히 남들과는 다르게 행동했을 뿐이었습니다. 블랙아웃이 된 상황에서 자신이 저지른 일로 성폭력 사건에 휘말린 터너는 마찬가지로 블랙아웃 상황에서의 자신의 행동을 기억 못 하는 에밀리의 행동을 자신의 기준에서 투명하게 해석해서 행동했고 그 사건은 에밀리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었습니다.
이처럼 투명성의 가정은 진실의 기본값과 함께 우리가 낯선 사람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 이 글은 책을 읽고 작성한 개인적인 감상문입니다.